머리아프고, 혼란스럽고, 잊어버리고 싶은 현실에 놓여있게 되어버릴 때,
우리들은 문득 여행을 떠나버리고 싶어집니다. 도피를 하듯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마치 눈을 돌리면 이 현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손에 든 두 번째 법정스님의 책이 '텅빈 충만'이었습니다.

전집으로 구매했던 법정스님의 책은 출간순서대로 놓여있었지만,
그냥 보이는대로 잡고 첫 페이지를 넘기며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바쁘지 않지만 바쁘게 살아가며 종종 놓이고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미물이라 불리고 있지만, 역시 소중한 생명이 담긴 풀잎 하나 하나의 얼을
읽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현실의 힘겹고 지독한 불합리에 집착하게 되기보다
마치 다른 세상을, 다른 세상을 살아가듯 그렇게 내려놓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법정스님의 이 책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세상이나 지금의 현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수장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피를 흘리며 독재에 맞서던 혼란스러운 세상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스님으로서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며 무엇을 보듬어야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글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벗님은 '스님'이 아니라, '선동자'를 좋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합리에는 맞서는 것이 옳은 것이라 여기고, 구부러진 것은 곧게 펴는 것이
맞다고 여깁니다. 이런 과정 자체도 마음만이 아니라 행동이 뒷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의미한 공염불로 흐르는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나서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텅빈 충만'에서 읽혀지는 법정 스님의 모습은
'제3자의 눈'으로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며 사그라지는 안타까운 생명에 대한
슬픔만을 이야기합니다.

소중한 생들을 그런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내던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자중했으면 하는 바람도 느껴집니다.
파고도 높은 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다음엔 낮아지게 되리라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이야기하듯, 불합리한 현실도 언젠가는 합리적인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걸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옳지 않는 독재에 대해서도 맞서는게,
항의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쉼없이 흔들리고 뒤바뀌는 현실과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스님의 정진하고 있는 그 진리와 부합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내내 고민이 됩니다. 저의 '옳은 정치'라는 집착이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흐르게 만들어버린 것일까요. '정치'라는 정치인 놀음에 제 스스로
얽매여 놀아나고 있는 것일까요. 현실이 독재건, 불합리건 항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들 스스로, 세상이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될 때까지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이것이 올바른 행동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짧은 것인지 이런 결론에는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같은 치열한 항의를 통해 얻어내었던 당연한 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누구도 지켜주질 않으니
이런 치열한 항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지나, 소중했던 민주정권이라 할 수 있는 10년이 지나고,
다시금 혼란스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공권력으로 찍어누르고, 흩어놓기를 반복하며 '표현'을 할 수 있는 '입'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렸기에 그런 것인지, 불합리와 부정이 날로 극심해지는 
현실에서 혼란스럽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노릇일 것입니다.

스님의 '현실에 대한 우려'가 가득 담겨있었던 책 내용을 오늘에 비춰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의 현실이 그 시절의 독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말이지요.

오늘 이 순간, 법정 스님이 이 현실을 이야기하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텅빈 충만'에서처럼 그저 이 현실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거라고
말씀을 하실까요. 스스로의 몸을 아끼며 더 크게 바라보라고 하실까요.
혹시 제가 글을 잘 못 읽은 것일까요. 혹시 그렇게 읽고 싶었던 것일까요.

내내 고민이 됩니다. 정치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바랬지만,
지금의 하나 하나 흘러가는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체온이 오릅니다.
'옳지 않은 것의 종결자를 보여주마'라는 듯 철판을 깔고 수장 자리에 앉아
나라를 깊은 바닥으로 내던지고 있는 이 현실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길게 바라보면 옳게 가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오늘의 하루 하루들은
정말 지독하기만 하니, 이를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짧은 걸까요.




 
신고
Creative Commons License 벗님의 저작물인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