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성향을 먼저 거론하자면, 벗님은 SF 영화를 좋아한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뭔가 그럴듯하고, 뭔가 있어 보이니까. 어쩌면 정말 저런 세상이 있을 것 같고, 저렇게 작동하는 기계가 있을 것 같으니까.

길거리에서 눈을 돌리면 쉽게 볼 수 있는 너무도 친근한 그 무엇이 아니라, 커다란 스크린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그 세계를 정말 좋아한다.

어린 시절 기억들이 많진 않지만, 6학년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친구네 집,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워 혼자 방 안에 있었는데 책꽂이에 새하얗고 양장본으로 된 어떤 책을 하나 집어 들게 되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도 거의 가물가물해졌다. 하지만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도 선명하다. 흔한 그림 하나 없었다. 페이지마다 깨알 같은 글자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페이지 양옆의 넉넉한 여백은 글을 읽는데 상당한 안정감을 주었다.

요즘은 문고판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페이지를 줄이기 위해 양옆의 여백들을 너무 많이 줄여버리는 것은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벗님에게는 그렇다.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하얗고 양장본으로 꾸려진 그 책의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주인공인 어떤 소년(혹은 소녀)가 무엇엔가 이끌려 다른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 누군가와 마주치기도 하고 대화를 나눈 것도 같은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느낌, 정말 신기하고 재밌다는 느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무슨 장르였을까, 아마 아동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글을 읽는 데 부담도 없었고, 어려운 어휘도 없었다.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들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내가 모험을 떠나고 있었고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흠뻑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벗님은 그렇게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 SF 영화를 보면, 어린 시절 그 책에서 보았던 감성들이 떠오른다.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상상들이 현란하고 멋진 영상으로 펼쳐진다. 아, 이렇게 멋지니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탄생하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블록버스터 영화도 좋아하고, 한없이 어설프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B급 영화도 좋아한다. 어쩌면 SF라는 단어 자체에 매료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걸려들었어!)


스타트렉 비욘드, 드디어 개봉했고 벗님도 당연히 극장을 향했다. 스타트렉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소설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다. TV 시리즈도 전 시즌을 모두 보지는 못했다. 고작 몇 개의 시즌만 보았을 뿐이다. 옛 시절의 극장판들도 몇 개만 봤을 뿐이다. 놓인 게 상당히 많다.

하지만, 떡밥의 제왕이 만들었던 스타트렉 더 비기닝과 어두운 다크니스는 보았다.

영상 표현 기술의 발전은 놀랍다. 이제는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기술적인 고민이 아니라, '어떤 영상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감독의 머릿속에 상상하던 '그 영상들을 시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상 산업의 주체가 '도구'에서 '영감'으로 그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과연 이번 스타트렉 비욘드는 나에게 어떤 영상을 선사할 것인가. 그 결론은…. 캬, 멋지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며 정말 신기한 앵글의 장면을 보면 '어떻게 찍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앞서서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해요소로 작용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스타트렉 비욘드는 어디까지 CG일지 아예 분간되질 않으니,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고 남들 모르게 입을 아 벌리고 '멋진 군화멋지군화'를 우아하게 신으면 된다. (3D, 아이맥스 극장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스타트렉 비욘드에서는 아주 짧게 언급되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과연 나라면'이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장면은 엔터프라이즈호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승무원들을 대한 커크 함장으로서의 심정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커크 함장은 엔터프라이즈호에서 함께 생사고락은 겪다가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크게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엔터프라이즈호라는 넓은 근무 공간에서 이름도 모를 어떤 승무원이어서 혹은, 극이 너무 진중하고 무거워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까.

벗님은 개인적으로 이렇게 술 한 잔 마시기 전에 짧은 멘트로 대신해버리게 된 그 이름 모를 승무원들의 죽음이 너무 슬프다.


미국 TV 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허스키한 음성이 매력적인 아마다 함장은 극 중에서 함을 이끌 때는 거의 표정이 묻어나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군인 장교, 싸일러가 쳐들어와 하나 남은 함선을 언제 박살 낼 지로 모르고, 되돌아갈 수 있는 행성도 없으며, 남은 인류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함선에 모두 타고 있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놓인 조각배 같은 심정일 테니 어찌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적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라(목숨을 버리라)는 매정한 명령을 내려야 하는 함장의 심정을 어떠할까. 짓누르는 무게에 부서지리라. 아마다 함장은 그 슬픔을 감내하며 그렇게 지휘관의 자리를 지킨다.

커크 함장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발랄하고 즐겁고 활동적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그의 행동을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수많은 승무원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 자리에 커크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도 옳고, 행동도 정확하게 된다면야 영화에서처럼 멋진 결과겠지만, 만에 하나 판단이 옳지 않거나, 실수 혹은 정확하게 행동이 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되돌릴 수 없는 피해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시도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다시금 시도할 수 있는 그런 Plan B도 없이, '나만 믿어, 내가 해결할 수 있어'와 같은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 영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저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주야장천 달려나가는 스토리에 대해서는 썩 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한 명의 영웅'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그 영웅을 '함장'으로 해야 했을까. '전체를 이끄는 리더'와 '앞장서는 리더'는 역할도 역량도 다르다.

'앞장서서 전체를 이끄는 리더'는 잘못하면 위험천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 알고 있는가, 절벽 밑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레밍즈의 행렬을.

*

자, 그럼 이 영화 보라는 건가요, 보지 말라는 건가요?

벗님은 별 5 만점에 4.5 드립니다.

- 1. SF 좋아하신다면 보셔도 좋습니다.
- 2. 스타트렉의 팬이라면 아마 보시겠지요.
- 3. 물 밑을 지나는 엔터프라이즈호, 정말 멋집니다! (이래도 안 보실 건가요?)

덧,

- 1. 혹시 보시려면 되도록 3D,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작은 스크린, 혹은 모니터,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은 그 크기만큼 멋짐도 아마 줄어들게 될 것 같습니다.
- 2. 왠지 우주 오이가 보고 싶어집니다. 다크니스에서 너무 강렬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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