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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님_단편] 그녀를 떨쳐 버리기

그녀가 내뱉은 말은 사실이었나 봅니다.
내게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으리라던, 천벌을 받으리라던.
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변합니다.

불변의 진리는 없습니다. 죽도록 사랑하던 그녀에게서도 이제 사랑을 느낄 수 없으니,
손가락 걸며 맹세했던 것은 하나의 행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변해갔고,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렇게 잊어 가는게, 잊혀져 가는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고, 자해를 하며 내게서 잊혀져버린 사랑을 주워 담으려
그렇게 처절한 몸부림으로 내 앞 길을 막았습니다.
이미 떠나버린 것은 사랑했던 마음 뿐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녀가 바닥에 뒹굴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애원하는 모습이 갸엾다기 보다는
'왜일까, 왜 저렇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가'라는 의문만 생겼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이름 모를 여인의 슬픔인 것처럼.

나는 그녀를 모질게 떨쳤습니다.
아니 실상 그녀에게 모질게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말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나 너 싫어졌어. 이제 사랑하지 않아."

돌아서며 그 이후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내 기억을 되집어보면 몇 명의 여인들이 모습을 들어냅니다.
내게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며 잊혀져간 여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하룻밤 만을 내게 선사했던 여인,
티격태격 다툼의 연속으로 이어지던 여인,
그리고 이 여인.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하던 여인.
그녀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를 나다워지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네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만들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정녕 내 자신이 원하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패배자의 어두운 늪에서 나를 건져내 씻도 닫아 하나의 표상을 만들었습니다.
난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깊이 움추려드는 습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

뜨거운 태양과 마주하며 호탕하게 손을 뻣어 'I Can Do!'를 외치는 내가 되었다.
칠흙같이 어두웠던 그 시절, 정말 내가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가?
그녀는 자신을 불살라 나를 만들었다.
난 조금씩 그녀의 노력으로 자신감이 생겨났다.
자신감은 내게 더욱 힘 있는 강인한 사람으로 변모시켰다.
힘있는 사람은 힘없은 사람일 수 없다.
오를 수는 있어도 내릴 수는 없다.
패배자의 늪으로 다시금 기어들어갈 수 없다.

난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를 없앴다.
홀현히 그녀에게서 벗어난 비굴하던 내 자신은 나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떠나 버렸다.
그 녀석은 그녀와 나의 끈을 함께 가져가 버렸다.

난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 그 녀석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했다.
더 이상 내게 과거는 없다.
앞으로 밝게 빛나는 불타는 태양만이 존재한다.
어둠의 그림자는 내게 없다.
내게 그녀와의 사랑은 없다.

그녀를 사랑했었을까, 공유했던 추억들이 있을까?
곰곰히 기억을 떠올려도 내게 그녀의 기억은 없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삶과 사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난 내 삶을, 내 사회를, 내 세상을 한낱 잊혀진 어떤 여인에게 줄 수 없다.
난 모든 것들을 얻었으니까, 이미 내 자신을 완성했으니까.
난 행복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가 내게 던진 말들은 사실이 되었다.
이런 젠장. 무엇 하나 빠짐없는 완벽한 내게 여인이 없다는 것.
늘씬하게 잘 빠지고,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없다는 건
순전히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 그 여인 탓이다.
그 여인이 내게 걸어버린 그 주문 탓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꺼라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을꺼라니.
이미 난 부와 명예, 모든 것들이 충족되었다.
먹을 거리에 파리때가 들끓 듯 농염한 여인들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누구 하나 내 손가락도 건들지 않는다. 제길.

이 여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고, 종합검사를 받고,

정통한 이들로부터 심리치료를 받고, 뜸을 뜨고, 침을 맞았다.
핼쓰를 하고, 에어로빅을 배우고, 요가를 하고 격투기를 배웠다.
이미지 매이킹을 받고, 패션 아티스트의 조언을 들었다.
발성법을 배우고, 붓글씨를 배우고, 두꺼운 책을 읽으며 내 자신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둘 째 치고, 근처에 머무르려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나를 멀리 했다. 무엇을 해도 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내 돈을 받는 이들이나 미소를 지었지만, 이들도 뒤돌아설 땐 인상을 구겼다.
모든 것이 완벽함에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음에도 난 사회에 섞일 수 없었다.

*

그날 내게 묻은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것일까?
비누로 몇 번을 씻고 씻었음에도 아직 그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일까?
난 완벽하게 그녀를 떨쳐 버렸는데, 완전히 그녀를 지워 버렸는데.
성공했는데.
완벽히.

어느 날인가 거리를 지날 때 뒤에서 소근 거리를 소리를 듣고 걸음이 멈춰버렸다.
더 이상 걸음이 띄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야, 저 사람 뭐냐! 뭐 저런 꼴로 다녀?"
  "아직도 모르고 있니, 제 미친거래. 게이도 아닌게 입고 다는거 봐라."

고개를 돌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붉은 원피스,
붉게 염색된 치렁치렁한 머리칼.
붉은 칠한 입술과 매니큐어.
붉은 하이힐과 붉은 색 가죽 가방.

그리고 턱진 사나이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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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이로츠 2007/01/15 0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와... 글 잘쓰시는거 같아요. 왠지 마지막 의미심장 한거 같은...
    저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워낙에 글빨리 없다보니;; ) 잘봤습니다 헤헤^^

    p.s// [벗님_단편] 그려를 떨쳐 버리기 이부분에 오타가 있는듯;;;

  2. BlogIcon 인사이더 2007/01/15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스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낄낄낄